SK하이닉스가 2025년 찍은 성적표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매출 97조원, 영업이익 47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이는 과거 PC·모바일 수요가 좌우하던 메모리 시장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AI와 데이터센터용 고성능 컴퓨팅이 메모리 시장의 ‘방향타’를 틀었다. 거대한 AI 인프라 수요가 한 번 점화되면 메모리 칩을 쉴 틈 없이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BofA는 2026년 전세계 D램 매출이 전년 대비 51% 급증하고 낸드도 45%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은 더 가파르게 성장할 전망이다. 한 분석에 따르면 2026년 HBM 시장 규모는 전년보다 58% 늘어난 546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세 덕분에 SK하이닉스는 업계의 ‘톱픽’으로 떠올랐다.
SK하이닉스 실적을 뜯어보면 이유가 명확하다. 지난해 HBM 매출이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뛰면서 전체 실적을 끌어올렸고, 일반 D램도 10나노 6세대 DDR5를 본격 생산해 서버용 메모리 경쟁력을 강화했다. 낸드 분야 역시 하반기에 기업용 SSD 수요로 만회하면서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회사 측은 “AI 학습에서 추론으로 수요 구조가 바뀌며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확대되고, HBM뿐 아니라 서버 D램·낸드 수요도 구조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PC·모바일에 묶였던 예전 사이클과 달리, ‘AI 데이터센터형’ 메모리 사이클이 이미 가동 중인 셈이다.
SK하이닉스는 이 기회를 기술 경쟁력으로 연결시켰다. 작년 9월 세계 최초로 HBM4(6세대)를 양산 체제에 올려 고객 주문 물량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SOCAMM2나 GDDR7 같은 차세대 AI 메모리도 준비 중이다. 이른바 ‘커스텀 HBM’ 개발에도 착수하며 고객 맞춤형 솔루션을 노리고 있다. 그 결과 2025년 영업이익률은 무려 49%까지 치솟았고, 분기별 기준으로도 사상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기록했다.
이 같은 흐름을 눈치챈 글로벌 자금도 몰려들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SK하이닉스 지분을 5% 넘게 사들였는데, 이는 2018년 이후 약 7년 만의 일이다. 업황 회복 초기 단계에서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반도체 ‘대장주’에 선제 대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반도체 업종 PER(주가수익비율)가 과거 저점보다 낮은 반면, 다른 산업들은 이미 고평가 구간”이라며 “반도체 섹터가 여전히 저평가 상태”라고 평가했다. 엔비디아 실적 발표나 GTC(글로벌 인공지능 콘퍼런스) 같은 중요한 이벤트들이 대기 중인 점도 투자 심리를 자극하는 요소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순풍만은 아니다. SK하이닉스 앞에는 경쟁사와 공급망 변수도 공존한다. 특히 삼성전자의 반격이 예사롭지 않다. 삼성전자는 AI·데이터센터용 HBM4 시장에 본격 진입해 고성능 티어를 공략 중이다. 지난 2월 세계 최초 11.7Gbps급 HBM4 양산을 발표했는데, 이 제품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루빈’ GPU 최상위 모델에 탑재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삼성의 HBM4 점유율이 30~40%로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격도 기존 제품보다 20~30% 높여 책정되어 수익성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여전히 HBM 시장 과반 이상을 책임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는 SK하이닉스가 HBM4 공급의 약 60~70%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기술 경쟁은 한층 뜨겁다. SK하이닉스는 안정적 제조 공정과 신뢰를 무기로 하고, 삼성은 최신 미세공정으로 성능 우위를 추구한다. 당장은 SK하이닉스의 기술이 안정적일지 몰라도, 엔비디아 등 고객사 요구 속도가 점점 높아지면 SK하이닉스도 최신 공정 도입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실 HBM만 있는 게 아니다. 데이터센터용 범용 D램과 낸드도 공급 부족이 심각하다. IDC는 2026년 D램·낸드 공급 증가율이 각각 16%, 17%에 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수요는 폭발적인데 공급은 한정적이다 보니 메모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삼성전자도 HBM 생산을 늘리는 한편, 치솟은 범용 D램 가격을 활용해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어쨌든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는 뚜렷한 상향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SK하이닉스는 이제 단순한 메모리 칩 제조사를 넘어 ‘AI 시대 핵심 인프라의 연료 공급자’가 되었다. 롱런의 관건은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도 품질·기술을 지켜내고, 고객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길게 보면 SK하이닉스는 이젠 AI 컴퓨팅 여정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References: SK하이닉스 뉴스룸『2025년 경영실적 발표…역대 최대 실적 달성』(2026.01.28); 연합뉴스 『SK하이닉스 “올해 HBM3E가 주력 제품…HBM4로 리더십 이어질 것”』(2026.01.05); ZDNet Korea 『SK하이닉스, 작년 영업익 47.2조원…AI 중심 재편 증명』(2026.01.28); KM저널 『블랙록, SK하이닉스 지분 5% 넘겼다…AI·HBM 올라탄 글로벌 자금』(2026.02.20); 뉴시스 『엔비디아, HBM4 이원화 전략…“삼성엔 기회, SK하이닉스는 부담”』(2026.02.20); 뉴시스 『메모리값 폭등 속…삼성전자, HBM·범용 D램 생산전략 주목』(2026.02.19); 인베스트조선 『엔비디아 공급 둘러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HBM 경쟁 2막』(2026.02.18).